삽화가 , 만화가 정현웅 선생에 대한 이야기들 역사단상




1. 보통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를 사는분들에게는 필연적인게 대일협력의 의미+ 이념적인 문제가 있고 그 와중에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케이스가 많은바.. 정현웅 화백의 경우는 특이하지만 나름대로 족적을 남기고 능력을 발휘한 케이스라고 보면 됩니다.

2. 1910년생인 정화백은 원래 정규 미술교육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이 뭐 이후 대중취향적인(..) 장르에 손을 댄 이유이겠습니다만 경성고보 재학중에 입선하고 이후 일본 유학을 갔다가 경제적 이유로 포기. 이후에도 독학으로 작품에 매진해서 여러번 상을 받았던 나름정규 입문파였어요. 전공살려서 문학잡지 창간을 하기도 했고 그림으로는 밥 먹기가 힘들기 때문에 동아일보. 후일 조선일보의 기자겸 삽화 담당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3. 이분이 신문에 있을때 주로한게 문인들의 여러 작의 일러스트를 남긴겁니다. 당시로서는 정규 화가가 이런거 하는게 말이 안된다고 보는분들이 많았습니다만 이분은 이때 이미 이쪽에 관심이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당대 동아. 조선일보의 유명연재소설의 삽화를 이 분이 썼고 후일 월북을 해서 "그런 사람이있지만 언급하면 안되던" 시절에도 "일제때 모 소설의 삽화가 아주 어울렸다"는 식으로 찬양받았던 그런 케이스입니다. 심지어 이런 연재물이 단행본화 할때도 표지장정이나 디자인을 맡아 할정도의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일제말에는 자그마치 시사만화까지 손을 대서 명실공히 대중적 예술적으로 이름을 남긴 케이스이지요

당연한(.)일이지만 일제 말엽에 제국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프로파간다 작을 굉장히 많이 남기셨는데.. 아시겠지만 해방후 행적덕분에 친일 인명사전에 빠지고 이 사람 욕하는 분은 없다는건 함정이구요 ㅋㅋ

4. 해방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고 해방조국의 미술계를 위해서 여러 정치활동을 한게 대한민국 정부에 걸리는 바람에 국민보도연맹(..)에 걸려서 반공(!!)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상기의 윤석중 선생의 삽화도 그 시기에 나온것이고 이후 여러 소설의 일러스트와 단행본 삽화를 남기셨어요.

6.25때는 피난을 못간 이유로 북에 체포됬는데 "나는 리승만에게 투항해서 반성합니다"류의 전향서를 쓰고 역시 인민군 점령하에 서울에서 활동을 벌이다. 국군의 수복후 걸리면 피곤한지라 가족을 버리고 월북을 하게 됩니다.

6.25연간에 월북. 납북. 포로가 되었다가 북한을 선택(..)한 화가들이 정말 많습니다만 대부분 "자잘한 직책 받고 땡" "작품 활동없음" "지구상에서 증발함" 의 길을 밟은 때 이분은 소련출신의 변월룡과 함께 북한의 대표화가로 잘나가는 길을 밟습니다(아니 일제때도 그런 일했고 반공작도 그렸는데?) 감히 "장군님께서 건의하신 조선귀화와 이주"를 거부하고 소련으로 건너간 (물론 소련 출신 아내가 몸이 아픈것도 있었지만) 죄로 소련국적의 변월룡이 북한미술사에서 기록삭제(..)를 당한 반면에 변월룡이 북한 미술계에 소개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가장 조선적으로 이식시킨 작가로 이 정화백이 평가되고있어요. 이후 뭐 수령중심의 예술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구요

북한에서도 여러 잡지와 신문의 연재물 일러스트 작업과 만화. 최고인민회의장 장식 감독(오오오..)등을 했었고 "3.1 운동을 목도하시는 어린 김일성 장군님" "비밀 모임을 지도하시는 김일성 원수님"(..) "띈 소장의 투항"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 만행"(...) 같은 주옥(?)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특이한건 전후 북한내 산재한 고구려 고분 벽화 복원과 모사를 바로 이 사람이 한겁니다.(...) 아예 망가진 작은 일제때 사진도록과 기록을 일일히 맞추어서 복원하고 망가질 위기의 작은 모사를 해서 박물관에 전시한것이지요. 북한에서 나온 도록이나 관광 혹은 월북(..)등으로 우리가 고구려 벽화를 볼수 있는게 바로 정현웅 화백의 도움이 큽니다.

1976년 사망할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한 정화백은 어쩌면 일제와 분단이 낳은 예술인의 전형이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굉장히 잘나간게 차이지만요 ㅋ

덧: 정현웅은 북으로 가서 월북 여배우와 재혼합니다. 남의 가족들은 이후 미국 이민을 가고 부인은 끝까지 살아서 북한 방문을 실현하지요.재가도 안하고 남편 만나러 갔더니 남편은 죽고 새 부인의 가족들이 있었을때 부인의 심정은 어땠는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분이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이직한 계기가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때문입니다. 그때 사무실에 있던분 싹 잡혀갔는데 정현웅은 얼마후 석방되는데 이유가 "일장기 말소 작업하기전에 땡땡이 친다고 근무시간에 탁구하러가서"(...) 말소당시에는 자리에 없어서입니다. 다만 어쨌든 삽화 교정을 봐야 하는 입장인지라 짤리게 되지만요(결국 땡땡이를 쳐야한다는)

북한 어린이들에게는 정화백이 고분 영감으로 알려졌다죠. 일일히 고분에 들어가 작업하고 쉴때 나오면 어린이들에게 사탕주고 옛날 예기 해주던 영감태기... ㅋㅋ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일제때 작업- 해방후 좌익활동- 보도연맹- 북한 점령때 협조한 화가들중 상당수의 궤적이 아련합니다. 이쾌대는 월북후 행적이 미묘하고(그냥 늙어죽었다는 썰이) , 재일교포로 4.3때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에서 반전활동을 한 모 화가는 북송후 1년만에 "일본에 보내주세요"하다가 지구에서 증발(..)해버렸고 인상파 오지호 화백은 빨치산들과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체포후 징역 20년(이라고하지만 무죄) 받은 후에 박정희때 엄한 혐의로 또 1년간 감옥에 갑니다.(이것도 무혐의)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은 전시 미군에 투항해서 미군들과 선전 작업에 동원되었지만 보복을 피하고자 일본과 미국을 전전하며 1970년대까지 귀국하지 않습니다.(그전 작은 대부분 일본에서 보내거나 혹은 잠시 귀국때 그린겁니다. ㄷㄷ)